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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 Gwangnaru Ferry

Concept

無 · 常 · 廣 · 津 · 渡 · 河

無常 무상 Impermanence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여 고정됨이 없음

廣津 광진 Wide Ferry Crossing
사람들이 모여들던 넓은 나루터

渡河 도하 Crossing the River
강이나 내를 건넘

無 없을 무 · 常 항상 상 · 廣 넓을 광 · 津 나루 진 · 渡 건널 도 · 河 물 하

無 Nothingness · 常 Continuity · 廣 Expanse · 津 Ferry Crossing · 渡 Crossing · 河 River

Note

이곳 광나루에 서면 세월의 무상함이 짙게 밀려온다. 주변 풍경이 급속도로 변해버린 탓도 있지만 같은 장소가 끊임없이 다른 얼굴을 내어주는 모습을 보며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큰돈을 벌었을 때 떼돈을 벌었다고 말한다. 강원도 산골에서 베어낸 나무를 뗏목으로 엮어 한강을 따라 내려와 팔면 큰 재물을 얻을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 거대한 목재 시장이 형성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 광나루다. 하지만 지금은 다리와 도로 위로 자동차만 무심히 달릴 뿐 그토록 번성했던 옛 나루터의 왁자지껄한 흔적은 믿기지 않을 만큼 적막하게 사라졌다.

광나루는 한자로 넓은 나루를 뜻하는 광진이라 불렸으며 충주와 강원도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가장 첫 관문이었다. 맑은 강물과 드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한때는 많은 이들이 찾는 유원지로도 기능했다. 워커힐 호텔이 광나루 바로 위 아차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유도 그 빼어난 풍광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루터의 역할이 다하고 백사장마저 자취를 감춘 자리에는 다리가 세워졌다. 한강철교를 제외하고 한강대교에 이어 한강에서 두 번째로 놓인 다리가 바로 이 광진교다. 지역의 오랜 명칭이 다리의 이름으로 고스란히 남은 셈이다.

집 앞이었던 곳이라 자주 찾았던 이곳에서 역사를 짚어볼수록 이 물길을 건너갔을 수많은 사람의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눈앞에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맑은 날과 흐린 날 새벽의 물안개와 해 질 녘의 노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강의 표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을 것이다.

오늘도 한강은 묵묵히 흐른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이 만든 도시는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꾸지만, 강물은 과거에도 흘렀고 지금도 흐르며 미래에도 흐를 것이다.

Info

광나루
광나루는 경기도 광주와 서울을 잇는 한강의 주요 나루터로, 조선시대 수륙 교통의 요충지이자 강원도 상류의 물산이 집결하던 경제의 중심지였다.

광진교
1936년에 준공된 광진교는 철도교를 제외하고 한강에서 두 번째로 건설된 인도교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강대교의 교통량을 분산하고 강원도를 잇는 도로망을 확충하기 위해 나루터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6.25 전쟁 당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고 이후 노후화로 철거된 뒤 2003년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개통되었다. 현재는 보행자 중심의 걷기 좋은 다리로 재탄생하며 과거 사람들이 나루터를 걸어 강을 건너던 정취를 현대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워커힐 호텔 역시 과거 광나루 유원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지어진 건축물로 이 일대가 지닌 오랜 휴식처로서의 가치를 증명한다.

광나루 유원지와 워커힐
1970년대 한강 종합개발 이전까지 광나루 일대에는 뚝섬과 이어지는 거대한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여름철 수영장과 유원지로 널리 사랑받았다. 1963년 개관한 워커힐 호텔 역시 이 수려한 경관을 배경으로 아차산 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과거 휴식처로서 광나루가 지녔던 장소의 역사적 가치를 오늘날까지 짐작하게 해준다.

떼돈 벌다
뗏목 운행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했지만, 성공했을 때의 보상은 파격적이었다. 1864년 경복궁 중건 당시 군수의 월급이 20원일 때, 정선에서 서울까지 떼 한 바닥을 몰고 오면 단번에 30원을 받았다. 한 번의 작업으로 큰 소 한 마리를 살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이익을 얻었기에, 여기에서 ‘떼돈 번다’라는 말이 유래했다.

떼꾼
조선 후기부터 1960년대까지 강원도 남한강 상류의 질 좋은 소나무를 한양으로 운반하던 이들을 ‘떼꾼’이라 불렀다. 당시 강물은 지금의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했으며, 떼꾼들은 물에 뜨는 나무의 속성을 이용해 거대한 뗏목을 만들어 물길을 헤쳐 나갔다.

동가리와 바닥
통나무 8~10개를 엮은 한 단위를 ‘동가리’라 하고, 이 동가리를 12개에서 15개 정도 길게 이어 붙인 거대한 뗏목 한 척을 ‘바닥’이라 불렀다. 한 바닥의 길이는 보통 30m가 넘었으며, 물길에 능숙한 앞사공과 힘이 좋은 뒷사공이 2인 1조가 되어 운행했다.

떼꾼의 애환
광나루와 뚝섬 등지에는 떼꾼들의 돈을 노린 수많은 객줏집이 성행했다. 험난한 여울을 넘으며 벌어들인 떼돈을 주색과 노름으로 탕진하고 돌아갈 여비조차 남기지 못한 떼꾼들의 애환이 강물 곳곳에 서려 있다. 1960년대 말 팔당댐이 건설되면서 떼꾼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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