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Stillness
Concept
寂 · 寞 · 幽 · 風 · 景
寂寞 적막 Silence
적적하고 고요함
幽寂 유적 Deep Stillness
깊숙하고 고요함
風景 풍경 Landscape
자연의 경치
寂 고요할 적 · 寞 고요할 막 · 幽 그윽할 유 · 風 바람 풍 · 景 볕 경
寂 Stillness · 寞 Silence · 幽 Deep · 風 Wind · 景 Scenery


































































Note
거대한 도심을 관통하는 한강의 양 가장자리는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같은 거대한 자동차 전용도로로 굳게 가로막혀 있다. 그곳에 닿으려면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거나 육교를 건너고, 때로는 비좁은 계단을 오르내려야만 한다. 일상에서 강변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는 일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거대한 단절은 오히려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고 토끼굴 같은 통로를 지나 한강에 진입하는 순간, 마치 도시에서 자연으로 넘어가는 신비한 문을 통과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세상의 소음은 등 뒤로 멀어지고, 거대한 중립지대에 발을 들인 것처럼 시간의 흐름마저 바뀐다.
도심 속 한강 주변은 늘 분주하다. 출퇴근 시간 수많은 교각과 도로 위로 자동차들이 강을 포위하듯 넘쳐흘러도, 한강의 중심은 언제나 묵묵히 제 길을 갈 뿐이다. 도시가 출근길로 바삐 움직이는 아침, 인적이 드문 강변에 서면 비로소 강과 나는 오롯이 마주하게 된다. 그 순간 한강은 일상의 번잡함을 거두어내고 본연의 묵직한 고요함을 드러낸다. 강 주변을 맴돌던 도시의 소음이 잠시 멈춘 듯 정적인 순간이 찾아오면, 평범했던 도심의 풍경은 사색과 명상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거친 콘크리트 구조물과 부드럽게 일렁이는 물결의 대비는 현대 도시와 자연이 빚어낸 이중적인 풍경이다. 나는 한강의 중심에서 끝없이 흐르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며 사진을 찍다 보면 어느새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강물이 품고 있는 깊이 속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겨져 있던 도시의 새로운 서정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강이 건네는 고요한 위로를 마주한다.
과거 한 폭의 수묵화 같았던 전통적인 강의 모습은 대부분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의 한강을 깊이 들여다보면, 도시가 잉태한 또 다른 낯선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정해진 통로를 빠져나오면 다시 속도감 있는 도시의 시간으로 돌아가지만, 나는 카메라를 들고 강물이 품은 고요한 풍경을 묵묵히 기록한다.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강은 여전히 흐른다. 나는 그 변함없는 흐름 속에서 도시와 자연 사이에 머무는 한강의 짙은 고요를 바라본다.
Info
예로부터 한강은 시인묵객들이 끊이지 않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했다. 강물이 호수처럼 잔잔하고 고요해 크게 동호, 서호, 남호로 나누어 부르며 풍류를 즐겼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잠실수중보와 신곡수중보의 영향으로 강물이 갇혀, 과거 시적인 의미로 호수라 불리던 한강이 사실상 거대한 인공 호수처럼 변해버린 것은 역사의 모순처럼 보인다.
조선 초기 문신이자 학자인 서거정은 광나루 일대에서 바라본 한강의 빼어난 풍경을 한 편의 시로 남겼다. 번잡한 현대의 한강과는 달리, 과거의 한강은 하늘과 땅을 모두 품을 만큼 넓고 아득한 자연 그 자체였다.
乾坤納納一江湖
千里渾成水墨圖
白鳥去邊水明滅
青天盡處山有無
천지의 풍경이 강호에 담기고
천 리의 경치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새가 날아가는 자리마다 물빛이 밝았다 어두워지고
푸른 하늘 끝에는 산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조선 초기 서거정, 광진촌서만조(廣津村墅晩眺), 광나루 풍경
광나루는 한양과 강원도를 잇는 중요한 수운의 요충지이자 수려한 경관으로 이름난 명승지였다.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지금의 도심 속 한강과 달리, 옛 선인들은 물빛과 산세, 그리고 날아오르는 새들이 어우러진 거대한 자연의 여백으로 한강을 마주했다. 시대가 변해 수묵화 같은 옛 풍경은 사라졌지만, 강은 멈추지 않고 흘러 오늘날의 도시에 새로운 고요를 선물하고 있다.